일본 정치사의 새로운 페이지가 열렸다.
그러나 그 페이지가 ‘진보’의 상징일지, 아니면 ‘퇴행’의 서막일지는 아직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일본 자민당의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상이 2025년 10월 4일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승리하며 사실상 일본의 차기 총리로 확정됐다.
일본 역사상 첫 여성 총리라는 상징성 뒤에는, 극우 민족주의 성향이라는 복잡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1. ‘여자 아베’의 귀환 – 일본 첫 여성 총리의 탄생
결선투표 결과 다카이치는 185표를 얻어 156표의 고이즈미 신지로를 제쳤다.
일본의 관례상 여당인 자민당의 총재가 곧 총리가 되기에, 그녀는 오는 15일 국회 총리 지명 투표를 거쳐 정식 취임하게 된다. ‘포스트 이시바’ 시대의 첫 페이지다.
그녀는 ‘여자 아베’로 불릴 만큼 강한 보수 성향으로 유명하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정치 노선을 계승하며, ‘전쟁 가능한 일본’을 꿈꾸는 헌법 개정론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당선은 단순한 정치 승리가 아니다. 일본 사회의 깊은 보수 정서를 반영하는 거울이자, 한일관계의 또 다른 시험대이기도 하다.
2. 첫 시험대는 ‘야스쿠니 신사’…참배 여부에 한일 외교 촉각
다카이치 총리의 첫 외교 시험대는 불과 2주 뒤다.
10월 17~19일 열리는 야스쿠니 신사 추계 예대제에서 그녀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가 관건이다.
그녀는 과거 여러 차례 신사를 참배하며 “총리가 돼도 계속 참배하겠다”고 말해 논란을 불러왔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이끈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장소다.
일본 총리가 참배할 경우 이는 곧 “침략의 미화”로 해석되며, 한국과 중국의 외교적 반발을 불러왔다.
2013년 아베 신조 이후 총리의 직접 참배는 없었다. 만약 다카이치가 그 전례를 깨면, 한일관계는 순식간에 냉각될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정치가의 책무다.” – 다카이치 사나에, 과거 인터뷰 中
그녀의 이런 발언은 외교 문제를 ‘내정 간섭’으로 치부하는 일본 내 보수층의 논리와 맥을 같이한다.
하지만 우리 한국 입장에서는 이는 ‘역사 부정’에 가까운 행동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3. ‘다케시마(독도)의 날’ 발언, 또 다른 폭탄
야스쿠니 이슈보다 더 폭발적인 것은 바로 독도 문제다.
다카이치는 과거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 장관급이 직접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일본 시마네현은 2005년부터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제정해 매년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일본 정부는 최근 몇 년간 차관급 인사를 보내왔지만, 다카이치가 이를 ‘장관급’으로 격상시킬 경우, 이는 곧 한국에 대한 외교적 도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한일관계는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가 복원한 ‘셔틀외교’ 덕에 10년 만에 정상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다카이치의 한마디, 한 걸음이 그 기반을 흔들 수 있다.
전문가들은 “그녀가 상징적 민감 사안을 건드리면, 이시바가 남긴 협력 기조는 무너질 것”이라 경고한다.
4. 다카이치의 외교 노선, 어디로 갈까?
다카이치는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행보는 아베 신조의 외교 노선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를 외치면서도, 역사 인식에서는 철저히 보수적이다.
중국 견제와 대북 강경노선에 초점을 맞춘다면, 한국과의 공조는 단기적으로는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정서적 신뢰’다.
한일관계의 뿌리는 외교문서보다도 감정의 교류에 가깝다.
과거사에 대한 존중 없는 협력은 오래가지 않는다.
다카이치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여성 총리’라는 상징은 금세 ‘보수 회귀’라는 비판으로 바뀔 것이다.
5. 일본 내부에서도 엇갈린 시선
흥미로운 점은 일본 내부에서도 그녀의 당선을 마냥 환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본 언론은 “첫 여성 총리의 탄생이지만, 가장 남성적인 정치”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본 진보진영은 그녀의 당선을 ‘역사적 순간이자, 역사적 퇴보’로 규정했다.
즉, 유리천장은 깼지만, 동시에 민주적 다양성의 천장은 다시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카이치는 결코 만만한 정치인이 아니다.
대중적 카리스마, 강한 리더십, 그리고 아베파의 정치적 유산을 완벽히 흡수한 그녀는 이미 자민당 내에서 ‘절대적 존재감’을 확보했다. 이는 우리로서도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다.
6. 한일관계, ‘셔틀외교’의 시험대 위에 서다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총리가 어렵게 복원한 셔틀외교는 이제 거센 시험대 위에 올랐다.
만약 다카이치가 야스쿠니를 참배하거나 독도 관련 발언을 내놓는다면, 이는 즉각 한일 관계의 냉각으로 이어질 것이다.
전문가 조진구 경남대 교수는 이렇게 분석한다.
“야스쿠니 참배나 다케시마 관련 언급은 한일관계는 물론, 중국과의 관계까지 뒤흔드는 불씨가 된다.
일본이 올해 주최하는 한중일 정상회의 개최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7. 결론 – ‘유리천장’은 깼지만, ‘한일의 벽’은 더 높아졌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일본 정치에서 여성의 한계를 깨뜨렸지만, 동시에 외교적 리스크의 문을 열었다.
그녀가 아베의 그림자를 벗고 실용 외교를 선택한다면, 일본은 아시아에서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보수 민족주의로 회귀한다면, 한일관계는 또다시 2010년대 초반의 냉각기로 되돌아갈 것이다.
결국 관건은 그녀의 ‘첫 100일’이다.
야스쿠니에서의 한 걸음, 그리고 독도 문제에 대한 한마디가 한일관계의 10년을 결정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적 첫 여성 총리’가 아니라, ‘역사적 외교 시험대’ 앞에 선 다카이치를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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